옛친구를 만났다

'97광주비엔날레 'artistic diractor'와, 그 바쁜 경황에도 꼭꼭 일주일에 하룻밤씩의 세미나를 같이 했던 친구가 찾아왔다. 디렉터는 계원조형예술대, 독일의 그 미디어예술공간, 부산비엔날레, 백남준아트센터를 거쳐 다시 광주로 돌아왔다. 친구는 인제미술관, 의재미술관을 거쳐 광주 문화도시 일을 하고 있다.

밤이었고, 우리들의 15년은 너무나도 변화가 많았다. '귀전원가'의 오류선생 이야기가 깃든 해남 옥천 동리서실의 구들장방에서 우리는 하룻밤을 같이 자고, 백련사 동백숲을 걷다 차를 마셨다. 동안 나는 어떻게 살아왔던가?
 
아무튼 고향땅에서 다시 그들과 '예술'을 얘기했다. 둘도, 나도 '예술'의 존재방식이 변화해야 한다는 것과, 그 변곡점의 내용과 방식들, '실천궁행'의 케이스스터디가 긴요하다는 등등에 공감했다.
 
연이어 인천아트플렛폼의 그녀도 찾아왔다. 이야기는 길 필요가 없었다. 인천, 광주, 강진, 제주가 함께 하는 작업들에 대해 얘기했다.
 
'잊으려고 하지 말아라
생각을 많이 하렴...
아픈 일일수록 그렇게 해야 해...
무슨 일에든 바닥이 있지 않겠니?
언젠가는 발이 거기에 닿겠지...
그때... 탁 치고 솟아 오르는 거야.'
('기차는 일곱시에 떠나네', 신경숙) 

흐르는 물처럼 원숙하고 구족하게 모든 일들을 꾸려가고 싶다.

by 물소리 | 2012/01/29 19:09 | 물소리 | 트랙백 | 덧글(0)

구강포

.

by 물소리 | 2011/09/16 18:14 | 명발당 | 트랙백 | 덧글(0)

司諫院正言 翁山 尹公 墓誌銘



공은 휘는 서유(書有), 자는 개보(皆甫)이다. 해남 윤씨(海南尹氏)인데 중세에 강진(康津)에 옮겨 살았다. 윤씨의 자취는 어초은자(漁樵隱者) 효정(孝貞)에게서부터 비로소 나타났고 그 아들 귤정(橘亭) 구(衢)가 호당학사(湖堂學士)가 되었고 효정(孝貞)의 형 효례(孝禮)도 또한 행의(行誼)가 있었으니, 공의 조부이다. 그 뒤에 면면히 이어져 혹 음직(蔭職)으로 벼슬하기도 하였다.

증조부의 휘는 홍좌(弘佐), 조부의 휘는 극효(克孝)이니 모두 현달하지 못하였고, 아버지의 휘는 광택(光宅)이니 또한 포의(布衣)로 세상을 마쳤다. 그러나 사람됨이 침지(沈鷙 침착하고 굳셈)하고 호매(豪邁)하여 자산을 천만금이나 모았는데, 베풀기를 좋아하고 남의 급함을 구제하였으며 빈객을 좋아하고 의기를 숭상하였다.

우리 선인이 화순 현감(和順縣監)으로 있을 적에 백련동(白蓮洞)으로 놀러 갔었는데 길이 강진을 경유하게 되었다. 목리(牧里)의 별장으로 공을 방문하여 즐겁게 환담하며 밤을 지새우고 시를 남겨 작별하였으니, 이는 건륭 무술년(정조 2, 1778) 연간의 일이다.

또 재산을 나누어 아우들에게 주고, 여러 자질들을 채찍질하여 학문에 힘써 문장을 이루게 하고, 제례(祭禮)를 정하고 제기(祭器)를 수리하였다. 그리고 아내를 맞을 때 면포(綿布)를 예단(禮單)으로 하는 것을 가법으로 삼았다. 출납에 인색하지 않으니 거지들은 해룡공(海龍公)이라 불렀다. 이분은 대개 윤씨의 중조(中祖)이다. 건륭 갑신년(영조 40, 1764) 11월 28일에 공을 목리에서 낳았다.

공이 취학(就學)하자 산 동쪽 심곡(深谷) 안에 서당을 별도로 설치하고 진사 윤은서(尹殷緖)를 맞아 스승으로 삼으니, 윤은서는 본디 학문을 널리 닦고 교회(敎誨)를 잘하였다. 관례(冠禮)를 한 뒤에 진산(珍山)에 보내어 경의과(經義科)를 익히게 하였으니, 곧 나의 외가이다. 서책과 필묵(筆墨) 이외에는 전화(錢貨)를 주지 않아, 공으로 하여금 춥고 배고픔으로써 근골(筋骨)을 괴롭게 하고 거친 밥을 먹음으로써 비위(脾胃)를 맑게 하도록 하였으니, 의방(義方)으로 자식을 가르친 것이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공은 부요한 집안에서 생장하였으나 능히 검약(儉約)을 숭상하고 분화(紛華)를 싫어하며, 행실을 돈독히 하고 말을 삼가며 문식(文識)이 넓고 넉넉하여 속유(俗儒)로서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경술년(정조 14, 1790) 사이에 공이 북으로 서울에 노닐면서 이공 가환(李公家煥)을 소릉(少陵)에서 뵈옵고, 또 우리 형제와 교분을 정하였다. 12년 뒤 신유년(순조 1, 1801) 겨울에 내가 장기(長鬐)에서 다시 강진(康津)으로 유배갔다. 이때를 당하여 무릇 나와 소릉(少陵 이가환을 말함)과 좋게 지낸 사람은 모두 죄망(罪網)에 걸렸었다. 공도 도강(道康 강진의 옛 지명)에서 옥에 불려들어갔다가 증거가 없어 나온 지 겨우 두어 달이 되었다. 이 때문에 두려워하여 감히 서로 방문하지 못하였다. 그 이듬해 임술년(순조 2, 1802) 겨울에 공이 부친의 명으로 종제 시유(詩有)를 몰래 읍에 들여보내어 서로 만나보고 술과 고기를 보내어 위로하기를, 

"백부(伯父 윤서유(尹書有)의 아버지요 윤시유(尹詩有)의 백부임)가 옛날의 일을 생각하여 말하기를 '친구의 아들이 궁곤하게 되어 우리 고을에 의탁하였는데, 내가 비록 관곡(館穀)을 제공하지는 못하더라도 두려워하고 삼간다는 한 가지 이유로 마참내 문유(問遺 안부를 묻고 물건을 선사함)조차 철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로부터 혹 밤에 와서 예부터 좋게 지내던 정을 계속하기도 하였다. 때마침 교리 김이재(金履載)가 고이도(皐夷島)에 귀양살이하였는데 나를 통하여 공의 형제를 알고 세망(世網)이 너무 촘촘함을 성대히 말하니 이속(吏屬)들이 모두 깨닫고 드디어 왕래를 막지 않았다.

내가 다산(茶山)으로 옮겨 살게 되어서는 더욱 공의 집과 가까워져 10리도 못 되었다. 공이 아들 창모(昌謨)를 보내어 나에게 경사(經史)를 배우게 하고, 드디어 혼인 맺기를 의논하고 이사하기를 의논하였다. 그리하여 가경(嘉慶 청 인정의 연호) 임신년(순조 12, 1812)에 창모가 우리집에 장가를 들고, 그 이듬해 계유년(순조 13, 1813)에 공의 온 집안이 북으로 건너가서 처음에는 귀어촌(歸魚村)에 살다가 지금은 또 이웃에 산다. 이것이 두 집이 서로 관계가 친밀해진 본말이다.

공은 경의(經義)로 두 번이나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북방에 산 지 4년 만인 병자년(순조 16, 1816) 가을에 정시(廷試) 병과(丙科) 제13인으로 합격하였으며, 그 이듬해 권지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보임되었다. 공의 나이 54세여서 법으로는 6품에 승진되어야 하나 당인(黨人) 중에 방해하는 자가 있어서 전조(銓曹 이조)에서 그대로 보류하였다. 무인년(순조 18, 1818) 여름에 심공 상규(沈公象奎)가 이조 판서가 되어 곧바로 주의(注擬)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임용되고, 가을에 사헌부 감찰로 옮겼다. 기묘년(순조 19, 1819) 여름에 사직서 영(社稷署令)으로 옮겨지고 늦겨울에 예조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경진년(순조 20, 1820) 가을에 조사(詔使)를 맞이하기 위해 도감(都監)으로 나아갔다.

도광(道光 청 선종(淸宣宗)의 연호) 신사년(순조 21, 1821) 봄에 효의왕후(孝懿王后 정조의 비(妃) 김씨(金氏))가 승하하자 공이 또 빈전도감 낭청(殯殿都監郞廳)에 차정(差定)되어 공로가 있었다. 6월에 병이 들어 위독하게 되었는데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하고 소패(召牌)가 있었다. 이에 이불 위에 조복(朝服)을 얹고 패지(牌旨)를 받았는데 조금 뒤에 숨을 거두니 곧 7월 초하루이다.

판서 한치응(韓致應)이 애석해 하여 마지않으면서, 

"문질(文質 외관의 미와 실질)이 겸비하기로는 우리 무리에서 쉽게 얻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하고, 사림(士林)도 모두 슬퍼하였다. 당로(當路)의 경대부(卿大夫)로서 이를테면 판서 김로경(金魯敬), 참찬 신재식(申在植), 승지 유화(柳訸) 같은 무릇 공을 깊이 아는 사람은 모두 '남인은 사람의 수가 줄었다.'라고 하였다.

공은 여러 서적들을 두루 보고 감별(鑑別)이 정밀하였으나, 거두어 간직하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았다. 근후(謹厚)하고 말이 적으며 평생에 남의 장단점을 말하지 않았다. 강진(康津)은 호향(互鄕)이건만 온 고을이 모두 현사(賢士)라 하였고 벼슬길은 나그네와 같건만 친한 사람은 모두 길사(吉士)라 하였다. 앞길이 더욱 멀고 먼데 중도에 돌아갔으니 아, 슬프도다.

목리(牧里)의 서쪽에 옹중산 소서(翁仲山小墅)가 있으므로 자호를 옹산(翁山)이라 하였다. 그 동쪽에 용혈(龍穴)이 있으니 자못 천석(泉石)의 아름다움이 있으며, 또 그 서쪽에 농산별업(農山別業)이 있으니, 덕룡산(德龍山) 모든 봉우리가 나열하여 그 집과 마주하고 있으며, 조석루(朝夕樓)가 있어 산의 푸르름을 움켜 쥐고 있다. 옛날 나와 함께 노닐 제 봄가을 좋은 날이면 조기를 회치고 낙지를 삶아서 술잔도 기울이고 시도 읊으며 즐겁게 한번 배불리 먹었다.

공이 이사한 지 6년이 지난 무인년(순조 18, 1818)에 내가 비로소 북으로 돌아와서 초라담(鈔鑼潭)에 배를 띄워 물 따라 내려가기도 하고 목욕을 하기도 하면서 함께 만년을 소요하며 우환을 같이 근심하고 안락을 같이 즐기면서 사돈간의 좋은 정을 누리었다.

공의 전원(田園)이 모두 남방에 있어 천리 밖에서 식량을 공급하니 늘 넉넉하지 못하였다. 과거에 오른 뒤에는 집안 형편이 더욱 영락(零落)하여져 한 해를 계획할 수 없었으되 공이 금문(金門)에 통적(通籍)한 것 때문에 끝내 뉘우치는 빛이 없었다. 그런데 풍등 석화(風燈石火)처럼 손가락을 퉁기듯 변하여 꺼져버리니 슬프도다.

어머니는 여흥 민씨(驪興閔氏) 사인(士人) 백언(百彦)의 딸이다. 부인은 창녕 조씨(昌寧曺氏) 구림처사(鳩林處士) 광수(光秀)의 딸이다. 3남을 낳았다. 맏아들은 창모(昌謨)이니 자는 백하(伯夏)이고, 다음은 창훈(昌訓)이니 자는 중하(仲夏)이고, 다음은 창고(昌誥)이니 계주(季周)이다. 공의 이름과 자 때문에 《서경(書經)》의 체로 이름을 지은 것이다. 창모 등은 각기 소생이 있는데 자녀가 어려서 적지 않는다.

무덤은 초부(草阜)의 북쪽 오곡(烏谷)의 서쪽, 곤좌 간향(坤坐艮向)의 언덕에 있다. 명은 다음과 같다. 

남방 사람은 공의 이사를 아쉬워했고/南方之人兮惜公徙
북방 사람은 공의 죽음을 아쉬워했네/北方之人兮惜公死
자신부터 중시조(中始祖)되어 북종이 되었고/自我爲祖兮爲北宗
면면하고 무성하여 공가(公家 왕실)에 벼슬하리라/緜緜薿薿兮仕于公 

[주D-001]호향(互鄕) : 옛날 중국 고을 이름. 지금 강소성(江蘇省) 패현(沛縣). 풍기가 나쁜 고장.《論語 述而》
[주D-002]공의……것이다 : 옹산(翁山)의 성명은 윤서유(尹書有). 자는 개보(皆甫)이다.《서경》은 크게 우서(虞書)·하서(夏書)·상서(商書)·주서(周書) 등이 있고, 그 아래에 대우모(大禹謨)·탕고(湯誥)·이훈(伊訓)·대고(大誥) 등의 편명이 있다.
[주D-003]곤좌 간향(坤坐艮向) : 곤방(坤方)을 등지고 간방(艮方)을 향한 좌향(坐向). 서남쪽에서 동북쪽으로 향한 좌향. 

(출전 한국고전번역원, <여유당전서> 중)

by 물소리 | 2011/09/01 01:47 | 舫山蹤原 | 트랙백 | 덧글(0)

유배자의 핍진한 심신을 달래던 곳

명발당과 농산별업, 용혈암, 석문, 청라곡, 괘탑암, 합장암, 능라곡 등 강진 도암 만덕리 고개 너머에 있는 남쪽 마을들을 다산 정약용 선생의 시문에 비춰 본 글입니다. 

110820_nongsanbeulup.hwp

by 물소리 | 2011/08/31 00:12 | 舫山蹤原 | 트랙백 | 덧글(0)

南道의 美, 솔찍 담백한 남도 사람들

- 백련사 대웅전 벽화

사진은 강진에 있는 백련사 대웅전 천정벽화의 한 장면이다. 이 지역의 여느 사찰들과 마찬가지로 주변풍광이 아름다운 이곳에는 250여년 전 대웅전을 중건할 때 그려 넣었던 천정벽화가 있는데, 그림은 그 중 하나다. ‘나한도’라고 이름붙인 이것은 다섯분의 나한들을 그렸는데, 여느 절에 그려진 불화라기보다는 이즈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만화에 더 가까운 모습이다.

이조 후기, 그러니까 영·정조시대에 절정을 이뤘던 우리문화의 황금기에 ‘민화’라는 형식의 민간그림이 크게 유행했었는데, 유려한 '산수'와 ‘매란국죽’ 같은 화제를 주로 다뤘던 선비화가들의 그림을 대신해 일반대중들도 그림을 좋아하고 소장하길 원해서 생겨난 것이다.


이것은 그런 민간그림이 불가와 탱화와 둬섞인 양식을 보여준다. 색이나 형태 인물표현 등이 일반적인 불화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천연덕스럽고, 민화라고 하기엔 나름대로 격조가 있는 그런 것이다. 다섯분 나한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백련사 홈페이지에 써 붙인 설명은 이렇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에 보면 아라한들은 모든 허물이 사라지고 공부를 이루어 번뇌가 없고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셨다고 한다... 이 나한도는 각자 자유분방하게 딴 짓거리를 하는 모습이 재미있다. 심지어는 잠을 자고 있지 않나, 조는 것은 기본이다. 특히 저 두 분 나한들은 달을 쳐다보면서 무슨 생각들을 하시는지 모르겠다.’


이런 그림이 그곳 대웅전 천정을 빙 둘러서 20여점이 그려져 있다. 사찰을 비롯한 꼼꼼한 전통문화 형식들에 문외한이지만, 이런 그림이 사찰 천정벽화로 그려진 곳은 아마도 다른 곳에 없을 성 싶다. 그만큼 이 그림을 그렸던 분(僧侶 畵工)의 상상력이 자유분망했고, 또 그것을 그곳에 그리게 했던 중창주의 품도 커 보인다.


이런 자유분망함이야말로 이곳 남도 사람들의 성격적 특질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보편적인 것이자만, 시골 사람들은 치밀하고 사리에 밝은 도시 사람들에 비해 그저 단순하게, 그러나 ‘의(義’)나 ’리(理)‘, ’정(情)‘ 같은 덕목들을 더 중시한다. 얼핏 보기에 이런 것들은 이 지역 사람들의 일반적 성정들로 드러나고 있는 듯 하다.


서남해안 지역의 대표적 총림이었던 대흥사는 그림의 풍모에서도 엿보이듯 불경은 물론 유가의 전적들도 자유로이 받아들인 듯 한데, 다산 정약용과 막역지우(莫逆之友)로 지냈던 아홉 살 연하의 아암 혜장선사의 삶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는 주역에 통달했었고, 대흥사의 젊은 학승 초의선사를 데려다가 다산에게 유가의 경전을 배우라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 맥락 속에 대흥사와 초의선사, 다산 정약용과 아암 혜장선사, 고산과 공재, 추사 김정희와 같은 인물들이 존재한다. 이어서 요 근래 한국문학을 주름잡았던 기라성 같은 이름의 이 지역 출신 작가들까지를 생각해보면, 이런 문화적 자장이 얼마나 깊고 유려하게 이어지고 있는지를 새삼 확인할 수 있다. (해남신문 2011. 8)

by 물소리 | 2011/08/18 02:42 | 이미지산책 | 트랙백 | 덧글(0)

◀ 이전 페이지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