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으로 돌아왔다. 63년생인 나는 ‘79년까지 여기에서 학교를 다니다 80년에 광주로 가서 거기 내내 눌러앉아 30년을 살다가 귀향했다. 말이 귀향이지 사실은 ’반거치기‘다. 가족은 서울에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온 지 네 달밖에 안 되었으니, 보는 사람 생각으론 ’저놈이 여기에 살지 안 살지, 몇 년은 더 두고 봐야 알 일‘인 듯싶다.
동네에서 내가 제일 젊다. 게다가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고, 글을 쓴답시고 승용차를 타고 여기저기 ‘삘삘거리고’ 돌아다니니 영낙 없는 ‘반건달’이다. 해서 친척이나 이웃 어르신들은 나만 보면 걱정이 태산인 모양이다. 어떻게 먹고 사나 돈벌이도 걱정이고, 무엇보다 혼자 사는 먹성에 밥은 제대로 끓여먹는지, ‘부부는 함께 살아야 한다는데 저러다 뭔 일이 날지 모르겠다’는 것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 몇 달간 나는 그리 길지 않은 내 인생에서 가장 뿌듯한 시간을 보냈다. 누군들 아니랴만 귀향해 산다는 건 최고의 ‘로망’이다. 도연명은 ‘귀거래사’에서 대처로 가 벼슬살이(밥벌이)를 하다가 나이가 들면 고향으로 돌아와 일가친척 이웃들과 지내는 것을 무엇보다 높이 쳤다. ‘오류선생’. 출타해서는 대쪽 같은 기개로 세상을 향해 포효하지만 고향에 와서는 그런 생각일랑 멀리 내던지고 연못가에 휘들어진 수양버들 가지처럼 그냥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며, 텃밭을 일구고 학동들을 모아 글자나 가르치는 일이 그것이다.
변변한 밥벌이를 한 것도 아니고, 글도 30년 전의 센데이서울 표지처럼 그저 그런 내가 이런 고사를 들먹인다는 것 자체가 주제넘은 일이지만, 생각은 자유니까 해본 거다. 텃밭은 더더구나 아니다.
현실은 냉엄하기 그지없다. 두루 나보다 훨씬 더 실감하고 계시겠지만, 농촌경제가 말이 아니고 게다가 국가경제마저 바닥이니까 말이다. 갈수록 세상은 무한경쟁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또 실제의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내 할 도리만 하면 그만’이다. 너무 소인배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도시, 특히 내가 이사 가 살기 시작했던 ‘80년 이래의 사람들이 ‘공동선‘ 혹은 ’우리‘라는 이름으로 너무 많은 ’자기이익‘을 도모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주와 객’, ‘보편성과 일반성’, ‘나와 세계’를 너무 많이 혼동하거나, 단지 그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왜곡이 흔한 것이 그것이었다. 말로는 늘 ‘우리’를 들먹이지만 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저 혼자만의 우리’인 경우가 태반이었다. ‘개 눈엔 똥’밖에 안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너나 잘해’란 말의 쾌감에 푹 빠진 적이 있다. 스스로도 남 얘기 하지 말고, 누가 보기에 구질구질 하지 않고, 반듯하지는 못할망정 지나치게 구부러지지는 말아야겠다는 게 그것이다.
고향이지만, 30년을 밖에서만 나돌았으니 아직은 주변인에 불과하기에 되도록 말수를 줄이려 작심하지만, 나이도 어리고, 나도 사람인지라, 게다가 하는 일이 ‘입방정을 찧는 일’이라 조신하게 지내기가 여간 녹녹한 게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쉽사리 천방지축으로 재단하길 식은 죽 먹듯 해왔던 버릇은 고쳐질 수 있을까? 거울을 보며 늘 그런 시비지심을 버려야겠다고 마음먹곤 한다.
지역사회에서 이런 글을 쓴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생각한다. 얼핏 보는 주변사 몇가지에 생각이 없는 건 아니나, 또 달리 보면 이제 온 내가 알면 무엇을 얼마나 안다고 함부로 경망되이 입을 놀리겠는가 말이다. 해서 그냥 편하게 ‘사는 이야기’, 그것도 시시콜콜한 근황을 적어본 거다. 질정을 부탁드린다.
‘지족(知足)’. 좋게 보면 자기만족이지만 달리 보면 ‘제 맛에 사는 놈’인데, 되도록 좋게 봐주시길... 이즈음 내 낙은 날씨가 추워지니 장작을 가져다 아무도 없이 어둡고 시커먼 뒷부엌 아궁이에서 군불을 지피는 것이다. 불은 모든 것을 태우고 구들장을 데우지만 이내 보통의 바람으로 사라져 간다.
2009, 10. 29 강진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