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소(農所)’에 와서, 귀향의 변

고향으로 돌아왔다. 63년생인 나는 ‘79년까지 여기에서 학교를 다니다 80년에 광주로 가서 거기 내내 눌러앉아 30년을 살다가 귀향했다. 말이 귀향이지 사실은 ’반거치기‘다. 가족은 서울에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온 지 네 달밖에 안 되었으니, 보는 사람 생각으론 ’저놈이 여기에 살지 안 살지, 몇 년은 더 두고 봐야 알 일‘인 듯싶다.

동네에서 내가 제일 젊다. 게다가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고, 글을 쓴답시고 승용차를 타고 여기저기 ‘삘삘거리고’ 돌아다니니 영낙 없는 ‘반건달’이다. 해서 친척이나 이웃 어르신들은 나만 보면 걱정이 태산인 모양이다. 어떻게 먹고 사나 돈벌이도 걱정이고, 무엇보다 혼자 사는 먹성에 밥은 제대로 끓여먹는지, ‘부부는 함께 살아야 한다는데 저러다 뭔 일이 날지 모르겠다’는 것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 몇 달간 나는 그리 길지 않은 내 인생에서 가장 뿌듯한 시간을 보냈다. 누군들 아니랴만 귀향해 산다는 건 최고의 ‘로망’이다. 도연명은 ‘귀거래사’에서 대처로 가 벼슬살이(밥벌이)를 하다가 나이가 들면 고향으로 돌아와 일가친척 이웃들과 지내는 것을 무엇보다 높이 쳤다. ‘오류선생’. 출타해서는 대쪽 같은 기개로 세상을 향해 포효하지만 고향에 와서는 그런 생각일랑 멀리 내던지고 연못가에 휘들어진 수양버들 가지처럼 그냥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며, 텃밭을 일구고 학동들을 모아 글자나 가르치는 일이 그것이다.

변변한 밥벌이를 한 것도 아니고, 글도 30년 전의 센데이서울 표지처럼 그저 그런 내가 이런 고사를 들먹인다는 것 자체가 주제넘은 일이지만, 생각은 자유니까 해본 거다. 텃밭은 더더구나 아니다.

현실은 냉엄하기 그지없다. 두루 나보다 훨씬 더 실감하고 계시겠지만, 농촌경제가 말이 아니고 게다가 국가경제마저 바닥이니까 말이다. 갈수록 세상은 무한경쟁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또 실제의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내 할 도리만 하면 그만’이다. 너무 소인배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도시, 특히 내가 이사 가 살기 시작했던 ‘80년 이래의 사람들이 ‘공동선‘ 혹은 ’우리‘라는 이름으로 너무 많은 ’자기이익‘을 도모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주와 객’, ‘보편성과 일반성’, ‘나와 세계’를 너무 많이 혼동하거나, 단지 그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왜곡이 흔한 것이 그것이었다. 말로는 늘 ‘우리’를 들먹이지만 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저 혼자만의 우리’인 경우가 태반이었다. ‘개 눈엔 똥’밖에 안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너나 잘해’란 말의 쾌감에 푹 빠진 적이 있다. 스스로도 남 얘기 하지 말고, 누가 보기에 구질구질 하지 않고, 반듯하지는 못할망정 지나치게 구부러지지는 말아야겠다는 게 그것이다.

고향이지만, 30년을 밖에서만 나돌았으니 아직은 주변인에 불과하기에 되도록 말수를 줄이려 작심하지만, 나이도 어리고, 나도 사람인지라, 게다가 하는 일이 ‘입방정을 찧는 일’이라 조신하게 지내기가 여간 녹녹한 게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쉽사리 천방지축으로 재단하길 식은 죽 먹듯 해왔던 버릇은 고쳐질 수 있을까? 거울을 보며 늘 그런 시비지심을 버려야겠다고 마음먹곤 한다.

지역사회에서 이런 글을 쓴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생각한다. 얼핏 보는 주변사 몇가지에 생각이 없는 건 아니나, 또 달리 보면 이제 온 내가 알면 무엇을 얼마나 안다고 함부로 경망되이 입을 놀리겠는가 말이다. 해서 그냥 편하게 ‘사는 이야기’, 그것도 시시콜콜한 근황을 적어본 거다. 질정을 부탁드린다.

‘지족(知足)’. 좋게 보면 자기만족이지만 달리 보면 ‘제 맛에 사는 놈’인데, 되도록 좋게 봐주시길... 이즈음 내 낙은 날씨가 추워지니 장작을 가져다 아무도 없이 어둡고 시커먼 뒷부엌 아궁이에서 군불을 지피는 것이다. 불은 모든 것을 태우고 구들장을 데우지만 이내 보통의 바람으로 사라져 간다. 

  2009, 10. 29 강진신문

by 물소리 | 2009/10/28 22:41 | 물소리 | 트랙백 | 덧글(0)

쓸모 없는 것들의 쓸모

- 못난 소나무들을 보며

이것도 도시 사람 생각이지만, 시골살이를 하면서 가만 보면 비효율적인 것 투성이다. 제본제 자체가 돈이 최고요 더우기나 MB는 막나가는 삽질경젠데, 그와는 좀 차이가 있지만, 농촌경제나 사정 역시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일테면 이렇다. 몇억 몇십억원을 돈을 들여 무슨 사업을 하는데, 거기에서 나올 기대수익이라는 게 그냥 그작저작이다. 대부분의 나랏돈 쓰는 사업들은 그 흔한 타당성조사 하나 없이도 잘도 이뤄진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는 도처에서, 수도 없이 진행중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감 가는 부분이 많다. 쉽게 말해 자동차 팔아먹기 위해 쌀을 수입하니 자동차로 번 돈 세금 거둬 농촌에 쏟아 부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농촌경제는 말이 좋아 지역경제지 사실인 즉 관치경제의 독무대에 다름 아니다.

예전의 취로사업, 즉 공공근로, 노인일자리 사업이라는 게 있다. 이런 사업들의 대부분이 도로변 풀베기인데, 예전에 남의 집에 품을 팔러가서 하던 노동하곤 비교할 수가 없이 일이 수월하다. 그러니깐 정작 일손이 필요한 사람은 일손 구하기가 힘든 아니러니가 생겨난다.

또 다른 측면에서의 행위들도 마찬가지다. 사실은 전통시대의 관습에 따르는 것 대부분이 사실은 비효율성의 극치다. 이 정권의 실력자들은 이걸 어떻게 설명할까?

이즈음 시골에서는 바야흐로 시제의 계절이 다가왔다. 가을걷이를 한 지금부터 한겨울까지 윗대 윗대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시제는 사흘이 멀다 하고 열린다. 이것 역시 맑스에게나 케인즈에게나 또 MB에게 역시 다분히 비경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 든 노년층들은 이것을 목숨보다 중히 여긴다.

전통시대의 관습들 자체가 농촌사회를 기반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농촌경제가 뒷전인 지금의 관습들은 하루빨리 치워버려야 할 폐습인지도 모르겠다.

오늘 시제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한꺼번에 두 곳에서 치러지는 시제에서 한곳의 진행이 늦었다. 이쪽의 홀기를 외치는 사람은 종헌이 어쩌고저쩌는데, 저쪽에서는 아직 아헌 어쩌고저쩌고다. 왕왕 있는 일인데, 진설(상을 차리는 것)을 두고 참석한 사람들간에 의견이 엇갈렸던 까닭이다. 사소한 음식쟁반 놓는 위치 하나를 두고, 이게 맞니 저게 맞니 해서 시간을 허비한 것이다.

하지만 이게 꼭 비효율적일까? 또 있다. 계니 동창회니 해서 끼리끼리 어울리는 동류문화가 꼭 나쁘기만 한 것인가에 대해 자꾸만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특히나 농어촌사회로 둘러쌓인 광주와 전남에서는.

그래서 이즈음 나는 이런 말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남들이 뭐라든지 내 멋에 산다고. 이런 말도 생각한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싫어했던 희대의 살인마 신창원도 그가 도망다니면서 잠시잠깐 만났던 다방여자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사람이었다. 이 복잡계의 세상에 단 하나의 가치로 재단 될 대상을 없을 것이라고.

사진은 고향마을 선산을 지키고 있는 구부러져 못난 소나무다.

by 물소리 | 2009/10/28 22:23 | 이미지산책 | 트랙백 | 덧글(0)

은유와 환유로서의 소쇄원

2009광주디자인비엔날레 다시보기

은유와 환유로서의 소쇄원
‘소쇄원으로부터의 영감 - 최소크기(2×2×2m)로 압축된 쉼’

2009광주디자인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다.(9. 11 ∼ 11. 4) 격년제로 열리는 비엔날레가 열리지 않는 해에 열어왔던 게 올해로 세 번째를 맞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이 비엔날레를 순수비엔날레라고 하는데, 광주라는 곳에서 치르는 디자인비엔날레와 대별하기 위한 말이겠지만, 엄밀히 말해 이때의 ‘순수’라는 말은 이즈음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술이라는 말과 덧붙여서는 흔히 쓰지 않는 말이다. 게다가 이 순수라는 말 자체가 되레 순수하지 않은 경우도 많으니까 말이다.)

‘더할 나위 없는_THE CLUE'라 이름붙인 이 전시는 다섯 개의 전시장을 갖춘 전시공간을 염두한 까닭인지, ’맛, 집, 소리, 글, 옷‘이라는 다섯가지 소주제를 붙이고, 그것을 또 ’어울림, 살림, 살핌‘이라는 세 개의 말로 영역을 나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먹고 입고 사는 것이 다가 아니나 없어서는 안 돼는 것‘인 디자인의 우리 것을 중심으로 한 원형을 탐색하려 한다는 전체 행사를 사실 나는 모두 보지 못했다. 양림동 이장우 가옥과 사직공원의 것 말고도 여러 차례, 다양한 성격의 행사들이 있었지만, ’사정‘은 늘 여의치 못했다. 게다가 마음먹고 전시를 보러갔던 날, 나는 본전시만 보는 데에 꼬박 하루를 허비하고 말았다.

기실 다섯 개의 전시장에 들어찬 작품들을 두루 헤집고 다니면서도 나는 그다지 가슴 설레는, 발길을 오래 끌어당기는 작품들을 대하기가 어려웠다. 그것은 주로 비엔날레라는 대규모 전시가 갖는 특성에다가 작품 자체들에서 파생되었겠지만, 작품과는 관련이 작은 관람에 따르는 여러 가지 부가적인 요인들이 미치는 공학적, 혹은 인지적 특성 때문인지도 몰랐다. ‘수용미학’의 측면에서라면, 사실상 특정의 작품이나 전시에서 관객이 느끼는 미적 감응이라는 것은 거의 불가지의 세계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다채로운 ‘복잡계'의 세상이다.

‘집’, 그리고 ‘소쇄원으로부터의 영감 - 최소크기(2×2×2m)로 압축된 쉼’이라는 부제가 붙은 2전시장의 작품들은 내 취향에도 맞거니와 나름, 내게는 다른 것들보다 한결 정련되고 실속 있어 보였다. 광주에서 치르는 전시인 만큼, 그것이 치러지는 지역적 특성을 반영했다고나 할까? 몇몇 외국작가(대부분 건축가들 같았다)들과 일군의 디자이너 또는 무용가, 아나운서, 건축가들과 같은 이들의 작품을 사방 2m와 50cm의 공간에 물리적으로 재구성해 표현한 각 20개씩 모두 40여개의 작품들이다.

‘소쇄원은 00이다’와 같은 개념어 표현을 제시하고, 주어진 2m나 50cm 공간 안에 물리적 구성물을 재현하게 하는 다소 짜여진 프레임은 그러나 이 섹션의 작품들에서마다 제각각 다른 장단점들로 드러나는 듯 했다.

광주(의 근처)에 있는 이조시대의 전통적인 정원을 비엔날레라는 대규모 전시에서, 제한된 공간 안에 표현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리. 얼핏 다른 섹션보다 한층 정제된 느낌을 줬다. 사방 2m의 큰 작품 20개의 제시된 개념어 즉 제목들을 나열해보면 이렇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곳’(국수호, 무용),
‘단단하고 연약한 것, 유동적이고 정돈된 것, 정확한 것과 우연적인 것의 관계’(피터슈라이어, 독일 디자이너),
‘정리되어 있는 작은 기후변화’(하버드건축대학원의 한국학생들),
‘소우주의 재현’(쿠니오 와타나베, 일본 SGD구조사무소),
‘방’(배병우, 사진),
'관계들을 형성하는 기반’(PSC, 미국 건축),
‘틈을 통해 드러나는 공간(오핏 디에이, 미국 건축사무소),
’모호한 현상‘(전용성, 무대연출),
’시간, 물, 공기의 흐름에 의해 형성된 독특한 지세를 가진 지형‘(FOA, 영국 건축사무소),
’모이는 성질을 가진 것은 모두 흩어지는 것‘(이영학/신근식, 조각/흙벽전문),
’자연스러운 부자연스러움‘(FCZJ, 중국 건축사무소),
’대나무 숲은 통해 들어가는 순수한 마음의 공간‘(Thomas Schroefer, 하버드대 건축),
’쉼‘(배영진/배시정, 의상),
’어두운 방‘(Rintala Eggertsson, 노르웨이 건축),
‘명상을 하는 공간‘(nArchitects, 네덜란드 건축사무소),
‘빛을 내는 것’(서혜림, 미국 건축),
‘숨겨진 순간을 맞딱뜨리게 하는 것’(SsD, 미국 건축사무소),
‘겹겹의 공기/움직임으로 형성된 무정형의 깊이’(쇼 후지모토, 일본 건축),
‘고속을 위한 안식처’(타티아나 빌바오, 멕시코 건축),
‘관념’(손진책/양수인, 연극/건축),
‘결이 있는 곳’(박태홍, 목구조),
‘겹’(윤정섭, 음악),
'긴장을 풀어주는 장소’(세후이 엔도, 일본 건축),
‘침묵의 파장’(황인용, 아나운서)

모두 주어진 소쇄원에 관한 여러 텍스트들, 즉 사진이나 글, 동영상, 건축물들과 풍경, 직접관찰 같은 것들을 통해 여과해낸 결과물들이다. 아쉬운 점은 원본 텍스트가 가진 정형성이나 강한 의미체로서의 대상이 갖는 무게 때문인지 얼핏 어느 정도의 태두리 안에서 상상력의 한계가 멈춘 듯 한 점이었다. 익히 봐왔던 때문인지, 내게 이런 방식의 해석들은 그리 놀라울 만한 것들이 아니었다.

소쇄원은 사람과 자연이 만나 이뤄지는 고도의 추상적인 영역에서 은유와 환유의 방식으로 조영되고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대봉대와 애양단, 제월당, 광풍각 등속의 시설들은 기실 얼핏 떠오르는 말과 사물에 관한 단순한 의미보다는 당대의 사회/역사를 포괄하는 훨씬 더 복잡한 의미의 집합체들 속 어딘가에 떠도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조광조의 죽음으로 대별되는 호남 사림들의 슬픈 현실이 오롯이 담겨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의 지시체들을 빼놓고 말하는 ‘자연’과 사람‘간의 눈에 보이는 물리적 구성물들에 집중하거나 사적 사실의 단순한 기억에 의존하는 것은 디자인의 영역을 너머 진정한 그 공간의 현재적 의미화와는 거리가 멀 것이다. 정경운(문학비평)의 글 한토막이다.

‘공간이 진정한 생명성을 갖기 위해서는 당대적 의미를 통해 끊임없이 재탄생되는 수밖에 없다...... 공간(空間). 비어있음과 비어있음의 사이. 그 비어있음을 보기도 쉽지 않거니와 그 사이들을 유영하는 정신을 읽어내고 나아가 정신의 자세를 다시 현재화시킨다는 것. 결코 쉬울 리가 없다...... 육안의 시선을 거두고 사유의 응시를 요구하는 공간. 어쩌면 소쇄원은 이 고도의 개념적 체험을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공간일지 모른다.’

([공간, 그 비어있는 것들 사이에서 정신을 읽는다는 것], 계간 [[광주비엔날레]], 2007)
from 전라도닷컴, 2009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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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소리 | 2009/10/23 06:40 | 농소 | 트랙백 | 덧글(0)

다산의 공간조영과 요즘의 집짓기

어제는 목포 사는 친구가 다녀갔다. 광주에서 살다가 시골로 살러 온 나를 위해 부러 찾아온 것이다. 다산초당 근처 마을에 산다는 걸 생각했던지 발효차와 청차, 연잎차, 뽕잎차를 가지각색으로 가져왔다. 그와 함께 농소(옹산별업)와 수양리 옛집을 둘러보고 다산초당엘 갔다. 얘기는 여기에서 시작한다.

초당에 오르기 전 나는 친구에게 '비장의 장소'를 보여주려는 기대에 차 있었다. 그러나 다산초당명가 뒤쪽 공터에 이르자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거기에서도 이즈음 짓기 시작한 귤동의 '한옥짓기사업'의 일환으로 누군가가 또 한채의 집을 짓는지, 두세명의 목수들이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나 올릴 법 하게 크고 우람한 나무들을 다듬고 있었다. 좀 떫더름 했지만, 지나쳐서 내 비장의 장소인 그 집 쪽으로 갔다. 그랬더니 아뿔싸, 그 집은 말끔하게 사라지고, 마당과 집채로 나뉘어 2단으로 되어있던 집자리는 주변이 모두 정리되어서 휑한 하늘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한쪽에 시커멓게 그을린, 그나마 대부분이 없어지고 몇개 남은 구들장 방돌들과 함부러 나뒹굴고 있었다. 

그 황망함이라니!

올 봄 초당을 찾았을 때, 내게 그 집을 알려준 이는 광주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곧장 이곳에 와 살고 있는 후배였다. 그는 '시골집으로 이사 올까 말까 하고 못내못내 하던' 나를 이끌고 그집으로 들어가 그것을 보여줬다. 그러니까 그 집은 다산이 초당에서 지낼 때의 제자이자 귤동 입향조의 종손댁이라 했다. 하지만 여느 집 종손댁과 마찬가지로 그 집 형편이 여유롭진 못한 것 같았다. 농촌의 여느 빈집과 마찬가지로 굴뚝 연기가 사라진지 오래인 듯 한 그 집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토방마루에 서 보니 범상치 않은 그 집의 풍모가 금새 느껴졌다. 

바로 앞에 새로 지은 '다산초당명가' 건물이 높이 솟아있어서 다소간 풍치를 가리고 있었으나 집 앞에 펼쳐진 정경이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뭐 2층집처럼 높다는 게 아니라 예전의 집들에 비해 집이 크고 높다는 것이다) 올망졸망한 집들과 지금은 논으로 변한 마을 앞 어딘가에서는 다산의 시 '애절양'에 나오는 누에를 치던 잠실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멀리 구강포와 바다 건너 풍경들도 너무 좋았다. 그리고... 정말 인상적이었던 것은 거기에 있는 돌로 된 '주련'이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보통의 절이나 서원, 제각 같이 큰 건물 기둥에 새겨 걸었던 나무로 된 게 아니었다. 비탈진 산기슭에 있었던 집자리였던 까닭에 각기 높이가 다를 수밖에 없었던 마당과 집자리를 단으로 나눈 축대에 4개인가(?)의 돌판에 마치 목조건물의 주련처럼 글자를 새겨 축대의 기둥 삼아 새운 것이었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4언절구의 시구절인가, 아님 다산이 명명한 '다산팔경'을 적은 것인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데, 어렴풋이 그 집 일대의 풍치에 관한 것임에는 분명했다. 

세상에나! 그 돌주련이 대부분 버려지고 그나마 몇개 추려져 나뒹구는 새카만 구들장 방돌들 사이에 뒹굴고 있었고, 더 안타까운 것은 그중 하나는 함부러 내던져서 한쪽이 깨진 상태였던 것이다. (이럴 때 말이 필요없이 사진이 제격인데, 찍어둔 사진이 없다. 어제의 것도 생각치 못한 일이라 찍어둔 것도 없지만, 사진이라는 매체의 특성 때문에 혹여 그 집안 분들이나 관계된 이들에게 누가 되진 않을까 싶어 올리지 않는다) 

...

이즈음 전라남도에서는 곳곳에서 한옥짓기 사업이 한창이다. 귤동에서도 그 일환으로 여러채의 한옥들을 짓고있는데, 양옥 대신에 한옥을 지어 산다는데야, 자잘한 문제들을 제쳐놓는다면 나는 대체적으로 그게 좋다고 본다. 하지만 '친환경, 생태'를 내세우는 그 껍질을 한꺼풀 벗기고 곰곰 들여다보노라면 안타까운 구석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갑작스런' 집짓기가 그 하나다. 예전의 경우 한채의 집을 지으려면 몇년을 거쳐 궁리하고, 그 과정엔 살림집의 구조와 논밭 등의 일터와 집의 거리, 헛간-대문이나 문간채의 위치, 목재를 비롯한 재료의 마련과 목수, 토수 등 사람들을 구하는 것 등등 여러가지 과정들이 정말 느리고 차분하고, 그리고도 꼼꼼하고 '엽엽하게'(강진 사투리) 이뤄졌다. 수년씩이 걸리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이즈음의 그것은 구상에서 완성까지 한 1-2년 사이에 뚝딱 해치운다. 실제 공사기간은 반년을 넘지 않는다. 게다가 대부분의 집짓기는 주인의 역할은 거의 없고 설계만 정해지면, 주인은 단지 의뢰인일 뿐이고 이후로는 위탁받은 사람에 의해 일사천리로 지어진다. 

그러니까 짓는 동안 주인의 자질구레한 참견이나 도중에 필요할 경우의 설계변경 같은 게 이뤄질 리가 없다. 전근대적 집짓기와 효율성, 쉽게 말해 돈이 최고 덕목인 이즈음의 집짓기야 물론 이런데서 대별되겠지만, 아무리 시대가 그렇다지만, 더 효율적인 것(삶의 과정이나 질?)이 간과되지 않느냐는 거다. 그래서 집을 짓다가 처마나 토방마루의 높낮이를 조정한다거나 방 한칸 정도를 더 달아낸다거나 담장을 어떻게 쌓는달지 하는 소소한 집주인의 생각들이 거의 반영되지 않는다. 

또 이즈음의 새집들은 예전의 한옥들에 비해 대들보나 부재 같은 목재들이 장난이 아니다. 여느 대궐집이나 절간 같은 짓을 지울 때에나 쓰였을 법 한 큰 나무들을 쓰고, 또 그렇기 때문에 전체적인 집의 구조가 무척 크기 쉽상이다. 목수일을 하는 내 후배는 '서까레가 대들보 만 하다'고 했다. 그런데도 토방마루조차 없는 집도 많다. 뿐만 아니라 창 문들은 마치 여느 양옥집처럼 크게크게 내서, 거기에 창호지만 바르고 그치는 아니라 또 그 바깥 쪽에 유리창을 붙인 집들도 많다. 그렇게 단열이나 프라이버시가 중요하다면 아파트에서 살거나 훨씬 값싼 양옥을 짓지 왜 한옥을 짓는지 모르겠다. 

대개의 전통적인 한옥들은 그리 큰 나무를 쓰지도 않았고(못했고) 집이 넓지도 않았으며 높이도 낮았다. 아무리 부잣집이라도 말이다. 집은 사람이 편히 살기 위해 필요하다. 그래서 사람은 그 크기가 위압적이지 않고, 높이도 적당해야 하고, 그래야 단열도 잘된다. 아마도 4간 접집 정도의 크기라면 어지간한 여염집 크기로는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너무 작은 집도 궁상맞지만 너무 큰 집도 거추장스러운 점들이 많다. 짓고 사는데 돈도 많이 들어가고 말이다.   

이런 집들의 대부분의 기름보일러를 놓는다. 더러 화목보일러를 놓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이사 와서 나는 그런 집을 본 적이 없다. 또 내가 본 몇몇 화목보일러들은 열효율성이 떨어지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기름값보다 돈이 더 들어간다나? 그러니까 열효율(생태환경)을 생각하면 구들장방이 제격이겠지만, 집이 그을리거나 화재예방상, 또는 나무 해 때기가 거추장스럽다면 몇개의 방 중에서 하나 정도는 구들장 방을 놔서 이즈음 어디서나 그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장작불로 따뜻하게 구들을 지피는, 환경에도 좋고, 몸에도 좋은 말 그대로의 '황토방'을 만드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예전 같으면 나무 해 때기가 얼마나 힘들었나? 그런데, 세상이 천지개벽해 땔나무를 해 때지 않아도 되고... 게다가 그 지긋지긋한 구들장방이 세상에나 그 좋은 '황토방'으로 거듭나다니!

(강진군에 제안한다. 동네마다 있는 노인당에 겨울철이면 일정액의 기름값을 보조해주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노인당 기름보일러를 구들장방으로 바꿔라. 아님 그중 방 하나라도. 그리고 기름값을 마을사람 누군가-노인일자리 사업도 좋고, 무직자에게 줘서 뗄나무를 해 때게 해보자. 그럼 외화도 절약하고, 에너지도 아끼고, 적은 돈이지만 없는 살림에 시골사람 누군가에게 일자리 창출사업, 지역소득창출도 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또 있다. 집구조다. 토방마루를 안 놓는 것은 것은 물론 댓돌이나 쪽문 곁의 자그마한 툇마루, 뒷마루 같은 것이나 벽장, 다락방 같은 수납공간이 없는 것이다. 역시 그러려면 왜 한옥을 짓는지, 왜 한옥의 특장인 벽장을 만들지 않고, 아파트에서도 요즘은 이리저리 이사하기에 불편한 농짝들 들고다니지 마라고 붙박이장들을 설치하는 게 대세인데 그 큰 공간을 차지하는 장농짝을 신주처럼 모시고 사는지 모를 일이다. 

돈도 돈이다. 전남도에서는 한 마을이 열채 이상의 한옥을 짓고 그와 관련된 마을만들기 사업을 하면 건축비의 일부를 싼 이자에 빌려주고 3천만원씩을 그냥 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당 건축비가 5-6백만원씩이니깐 보통 짓는 크기로 30평 이상씩이면, 모두 1억 5천만원 이상씩의 큰 돈이 들어간다. 가뜩이나 어려운 시골살림에 굳이 이렇게 무리를 할 필요가 있느냐 거다. 뭐 그 정도야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면 별문제겠으나 어쨌거나 그런 돈이 빚이나 그밖의 부담으로 남는다면, '잘 먹고 잘 살려'는 취지 즉 애시당초 '성주'의 의도는 많이 반감되지 않겠느냐는 거다. 

귤동의 경우 사업의 취지가 민박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다산초당엘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고 돈을 벌어들인다는 것. 하지만 그것은 눈 먼 정부돈 갖다 쓰는 명분 뿐이지 실제의 민박이 이뤼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통상 민박이라면 거기에서 밥도 먹을 수 있는 게 상식이지 아무리 좋은 집이라도 잠만 거기에서 자고 밥은 다른 데 가서 먹어야 한다면 많은 경우 회피하지 않을까? 그것도 그것이지만, 군이나 도청 같은 기관에서 지역의 소득창출을 위한 체류형 관광사업을 한다면 잠자리 이외의 여러 인프라들을 잘 갖추거나 이미 있는 것들을 잘 매치시키거나, 운용의 묘미를 살려야 할텐데, 민박, 쉽게 말해 어느 지역에 호텔 하나 번지르르 하게 지어놓는다고 사람들이 거길 가겠느냐는 거다. 물론 사업계획서에는 구구절절 좋은 말들이 빈틈없이 적혀있겠지만 말이다. 

쓸데없는 말이 길었다. 나는 자꾸 '옛, 우리 것이 최고여' 같은 식의, 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원본' 지상주의를 지극히 싫어하지만, 다산선생이 살았던 귤동마을 얘기므로, 다산의 공간조영에 관한 시를 하나 덧붙이겠다. '다산팔십운'라 해야 하나? 다소간 시간을 들여 여유 있게 읽어봐야 할 긴 시다. 하지만 소박하고 근면했던, 그리고도 뛰어난 시대-역사와 미의식이 뛰어났던 다산과 그곳을 조영하고 살았던 사람들의 풍모가 그림처럼 선하게 떠오른다. 강진다산실학연구원의 황병기 교수가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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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매화나무 아래를 산책하다가 잡초와 잡목들이 우거져 있는 것이 보기에 안 됐어서 손에 칼과 삽을 들고 얽혀 있는 것들을 모두 잘라버리고 돌을 쌓아 단(壇)을 만들었다. 그 단을 따라 차츰차츰 위 아래로 섬돌을 쌓아올려 아홉 계단을 만든 다음 거기에다 채마밭을 만들고 이어 동쪽 못가로 가 그 주변을 넓히고 대오(臺塢)도 새로 만들어 아름다운 꽃과 나무들을 죽 심었다. 그리고 거기 있는 바위를 이용하여 가산(假山)을 하나 만들었는데, 구불구불 굽이지게 하여 샘솟는 물이 그 구멍을 통해 흐르게 하였다. 초봄에 일을 시작하여 봄을 다 보내고야 준공을 보았는데 그 일은 사실 문거(文擧) 형제가 맡아서 수고를 해주었고 나도 더러 도왔다. 그 일이 비록 곤궁한 자의 분에 맞는 일은 아니었으나 보는 사람이면 감탄을 하고 또 모두가 아주 좋다고 하여 시로써 그 기쁨을 나타내기로 하고 이렇게 팔십 운(韻)을 읊었던 것이다.

一日散步梅下隱其榛蕪手持刀臿斫其纏糾砌石爲壇因緣浸染於其上下爲砌九級以爲菜圃遂至東池拓其匡廓新其臺塢列植名花佳卉因其巖石爲假山一區迤邐彎曲水泉穿瀉起功在首春送春而竣文擧兄弟實躬厥勞余亦助焉雖窮約匪分觀者歎咨僉曰洵美爲詩志喜凡八十韻 (1809.1.?)

 

다산 속의 집을 빌려 사는데 / 賃屋茶山裏

어느새 많은 세월이 흘렀다네 / 欻然歲華走

떠돌이라 원대한 계획도 없고 / 萍梗無遠圖

게을러서 하는 짓도 늘 구차했지 / 呰窳計常苟

지금 두 번째 봄을 맞고 보니 / 及玆再見春

살기도 꽤 오래 살은 게지 / 棲息亦云久

봄바람 땅 힘을 부풀게 하여 / 條風散地脈

썩은 등걸에서도 새움이 돋는데 / 苞蘖出焦朽

한 가지 안된 것은 위치가 난잡해서 / 所嗟位置亂

석류나무가 화톳불자리에 서 있고 / 危榴雜薪槱

지대가 외지고 규모가 좁아 / 地偏寡模楷

시설하기가 영 지리하기에 / 施設竟鹵莽

예쁘장한 매화나무 한 그루도 / 娉婷一樹梅

바로 뒷간 뒤에가 있다네 / 乃在溷圊後

가슴속에는 자그마한 은둔처 생각이 / 胸中小丘壑

반평 을 두고 서려 있었기에 / 半生鬱蟠糾

다짜고짜 그 뜻 한 번 펴보려고 / 勃然思一展

분수를 따질 겨를도 없이 / 拙分末遑守

채소밭부터 먼저 만들렸더니 / 疆理先蔬圃

당장 도움이 되기에 설득력은 있으나 / 利近良易誘

산언덕이 너무 경사가 심하여 / 山阿劇波陀

거름흙이라곤 남아난 것이 없기에 / 糞壤流不有

돌을 죽 세워 난간을 만들고 / 樹石列欄楯

흙을 깎아 비탈을 평평하게 하려는데 / 削土平培塿

옛날 치산치수의 책을 읽었기에 / 舊讀玄扈書

돌계단 쌓는 법은 알고 있으나 / 梯磴法有受

이때가 바로 농사철이라서 / 于時値東作

마을 장정들 모두 들에 가 있었네 / 村丁悉在畝

일이란 시기 있는 것이기에 / 事期有緩急

좋고 나쁘고 가릴 겨를도 없이 / 未敢律臧否

삼태기와 삽을 손수 챙겨들고 / 畚鍤手自操

돌 다듬고 가래질은 벗들을 시켰더니 / 鐝勸諸友

은이가 수염이 나고 힘이 세고 / 殷也鬍有力

두 팔에 강한 근육이 얽혀 있어 / 强筋絡雙肘, 문거(文擧)의 아우 윤규은(尹奎殷)을 이른 것임

돌 뽑기를 가을털 뽑듯 하고 / 拔石似秋毫

우수처럼 산을 옮길 정도였는데 / 移山學愚叟

날랜 말 결국 넘어지듯이 / 快馬終一蹶

함부로 하다가 손을 다쳤다네 / 豪擧惜傷手

무르익은 싸움에 장수를 잃은 격이어서 / 酣戰折良將

허전하기 짝을 잃은 것 같았지 / 悵然如喪偶

어린 애들까지 다 불러들여 / 招呼逮童穉

그들 힘으로 모든 잡초 제거하고 / 聊用除蓬莠

세월 걸려서야 공사 마치고는 / 荏苒得竣事

조촐한 자축연을 가졌었다네 / 草草行勞酒

자질구레한 각종 씨앗을 뿌리고 / 播種具瑣細

밭두둑을 따로따로 나눠놨는데 / 畦畛各牉剖

씨앗이 붉으레한 무와 / 紫粒武候菁

잎이 녹색인 부추에다가 / 綠髮周顒韭

늦파는 용뿔같이 싹이 트고 / 晩蔥龍角茁

올숭채는 소 양처럼 두툼하여 / 早菘牛肚厚

쑥갓은 꽃이 국화 모양이고 / 茼蒿花似蘜

가지는 열매가 쥐참외 같아 / 落蘇蓏如萯

해바라기는 폐를 활기차게 하고 / 魯葵工潤肺

겨자는 구토를 멈추게 하지 / 蜀芥能止嘔

상치는 먹으면 잠을 부르지만 / 萵苣雖多眠

먹는 채소로 빼놓을 수는 없어 / 食譜斯有取

특히 토란을 많이 심은 것은 / 蹲鴟特連畦

옥삼이 입맛에 맞아서라네 / 玉糝頗可口

빈터에도 잡초만 제거해버리면 / 壖地剔榛荒

저절로 나 자라는 나물도 많아 / 旅生多野蔌

곁채에다는 명아주 비름 기르고 / 廊廡畜藜莧

울에다는 구기자나무 세우며 / 藩屛列杞枸

고사리 캐다가 국 끓여 먹고 / 捋薇充羹滑

쑥은 뒀다가 뜸 뜨는 데 쓰지 / 留艾備焫炙

띠 엮어 노루 못 뜯어먹게 막고 / 綰茨防鹿齕

말이 밟을세라 울 쳐놓았으니 / 揷籬虞馬蹂

채소밭 일은 대강 끝난 셈이기에 / 圃務旣粗辦

정원 못에 때를 닦아내기로 했다네 / 園沼思滌垢

그전부터 정자 동편의 못이 / 由來亭東池

좁고 작기 방아확만 하여 / 狹小如碓臼

산 밑까지 닿게 활짝 넓히고 / 拓展抵山根

바닥 찍어내고 차양도 넓히고서 / 斫豁蒙蔀

좋은 단풍나무 느릅나무 세워두고 / 尊賢立楓枌

몹쓸 떡갈나무 싸리나무 제거하고 / 鉏奸去柞杻

덜거덩덜거덩 큰 바위 굴려다가 / 砰訇轉巨石

산에 대어 섬돌처럼 쌓아놓으니 / 甃砌因會阜

산은 첩첩이 바위를 드러내고 / 山骨露嶙峋

맑은 샘물이 솟아올랐다네 / 泉脈集淸瀏

구멍을 키우고서 홈통을 대놓으니 / 疏竇灌連筒

물이 금방 장군에 넘쳐 흘러 / 坎液欻盈缶

곤이도 길러 뛰놀게 하겠고 / 跳躍涵鮞鯤

올챙이도 까서 기르게 하겠네 / 産育容蝌蚪

담 터진 곳은 대나무 심어 메우고 / 缺垣補脩竹

양 언덕은 수양버들이 가리고 있다네 / 夾岸扞垂柳

이웃에 중이 감탄하고 가더니만 / 隣僧嘆嗟去

아이에게 연뿌리를 보내왔는데 / 遺兒分碧藕

푸른 줄기 행채처럼 엉겨 있고 / 翠帶交荇妾

동그란 잎 마름이 쌓여 있는 듯 / 靑錢疊菱母

당귀는 묵은 잎 속에 새움 돋고 / 蘄芽雜老嫩

작약은 여기저기서 동 오르고 / 藥筍紛左右

부양은 줄 서 우산을 받쳐들고 / 膚癢森擎繖

국화는 찬란한 실끈을 토하지 / 綉毬粲吐綬

모란 묵은 뿌리는 쪼개내고 / 牧丹老根撦

감탕나무 늘어진 가지는 휘어 매고 / 冬靑遠條揉

애써 유초 구해 심었더니 / 苦覓乳蕉栽

바위 굴문 앞에는 봉미가 있고 / 鳳尾當巖牖

붉은 복사꽃 연분홍 살구꽃은 / 緋桃與紅杏

꽃잎이 교묘하게 새름새름 매달리며 / 花葉巧蟠紐

담뿌리에 자색 포도덩굴은 / 牆根紫葡萄

성난 용이 꿈틀거리고 있다네 / 怒龍鬱蚴蟉

노 그는 성품이 기교를 좋아하여 / 魯也性好奇

솜씨 부리는 일로 자부를 한다네 / 匠心乃自負, 문거의 이름이 규로(奎魯)임

바닷가에 가 괴석을 주워다가 / 怪石拾海濱

산봉우리를 구루마냥 만들었는데 / 峯巒象岣嶁

어떤 것은 비비 꼬여 소라고동 같고 / 或譎如螺螄

어떤 것은 맑고 빛나기 옥돌 같으며 / 或瑩如瓊玖

어떤 것은 장난하는 사자같이 보이고 / 或儇如戲狻

혹은 쭈그리고 앉은 개같이도 보이며 / 或愁如蹲狗

혹은 추장같이 우뚝한 것도 있고 / 或特如酋豪

혹은 암수가 쌍으로 있는 것 같은 것도 있으며 / 或雙如牝牡

기를 세워놓은 듯 솟아있는 것도 있고 / 或挺如旌纛

혹은 포개놓은 단지 같은 것도 있으며 / 或累如瓿甊

혹은 초라하기 중 같아 보이는 것도 있고 / 或窮僂如僧

혹은 여인처럼 예쁘장한 것도 있으며 / 或嬋嫣如婦

어떤 것은 팔들고 겨드랑이 벌리고 있고 / 或奮臂張掖

어떤 것은 머리 맞대고 목을 포개고 있으며 / 或交頸騈首

혹은 아롱자롱 충치 앓는 이도 같고 / 或齾齾如齲

혹은 언뜻 보기에 통발도 같고 / 或睒睒如罶

어떤 것은 이끼 돋는 누룩과도 같고 / 或潑苔如麴

어떤 것은 물 새는 조리와도 같고 / 或滲水如籔

혹은 술 취한 듯 붉으레한 것도 있고 / 或蒨紅如酲

혹은 늙은이같이 누르케케한 것도 있어 / 或梨垢如耈

제각기 모양새가 다르면서 / 各各殊姿性

잇달아 검푸른 빛을 띠고 있다네 / 延緣帶蒼黝

봄 산에 가랑비가 지나가면 / 春山度微雨

채소 싹이 맑은 기운 머금는데 / 菜甲含淸

누가 알리 유랑의 부엌에서 / 誰知廋郞廚

날마다 삼구반찬 장만하는 것을 / 日日供三九

이웃에서 술과 단술 보내와서 / 隣比送酒醴

남새밭 주인영감 수를 빌었다네 / 請爲圃翁壽

그리고 소평같이 외도 심으면서 / 遂種邵平瓜

나란히 밭갈던 옛날 저익도 생각하지 / 緬懷沮溺耦

안회도 끝까지 단사에 표음이었고 / 顔回竟簞瓢

순임금 역시 마른 밥과 풀을 먹지 않았던가 / 虞舜亦草糗

궁하고 배고픈 것 당연한 내 본분인데 / 窮餒固吾分

이 맑은 복이야 하늘이 주신 게지 / 淸福乃天授

더군다나 저기 시렁 위에는 / 況玆鄴侯架

사부의 서적이 가득 쌓여 있고 / 縹緗積四部

고단하게 살기에 저술도 많이 하여 / 窮居富述作

값어치 없어도 나는 천금처럼 아끼지 / 千金惜敝帚

시경 풀이하면서 노로 되돌아왔던 일 생각하고 / 箋詩思反魯

주역 주 내면서 유리에서 연역했던 일 추억한다네 / 疏彖憶演羑

오직 한 사람이 알았으면 됐지 / 惟求一人知

세상이 다 욕해도 걱정할 것 없어 / 寧愁擧世詬

쇠북끈이 아무리 좀먹어 떨어져도 / 追蠡雖剝落

큰 쇠북은 두드릴 것에 대비하고 있다네 / 洪鐘猶待扣

그 소리는 너무나 먼 곳이라도 / 聲流到天荒

울려퍼지기 포뢰가 우는 것 같다네 / 殷若蒲牢吼

산경도 있고 수지도 있으며 / 山經間水志

해학과 궤담이 이유에 가득하다네 / 詼詭函二酉

책상에는 꽃다운 향기 널려 있고 / 几案羅芬芳

의복은 해지고 추한 것이 편하지 / 衣袴甘老醜

잘 먹고 잘 입고 사는 자들 / 須知齧肥者

남 시키는 대로 하느라 피곤하고 / 趨承困指嗾

자잘한 이끗 쫓아 이곳저곳 돌다가 / 營營逐錐刀

의젓잖은 양 차면 해해거리는데 / 欣欣塞筲斗

그게 어디 제 벌어 제 먹는 백성들 / 豈若食力氓

하늘과 땅에 부끄러움 없음만 같으랴 / 俯仰無愧忸

이괘의 구이를 늘 보더라도 / 常觀履九二

영육을 초월해야 탈이 없느니 / 幽貞諒无咎  

by 물소리 | 2009/10/19 06:00 | 명발당 | 트랙백 | 덧글(1)

다산 정약용의 세가지 형상


이즈음 여느 지자체와 마찬가지로 강진에서도 이 지역을 다른 곳과 특화시키려는 여러가지 방식의 이미지메이킹을 시도하고 있는데, 다산 정약용이 그 대표적인 예다. 다산은 사후 그의 저작들을 통해 우리역사에 불후의 큰 위업을 이뤘다고 평가되어 왔는데, 그것은 19세기 말과 20세기, 그리고 특별히는 80년대 이래 주체적 민족의식과 현실이 마주치는 부분에서 다산 선생은 단연 추종을 불허할 만큼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중 강진에 있는 그 다산 선생을 시각적 이미지로 재현하고 있는 세가지 경우가 있어 비틀어서 보길 즐기는 나의 극히 주관적 생각으로 대별해보려고 한다. 

첫째는 1979년에 강진읍내 초입에 세운 것이다. 최근 그 옆에 있는 강진의료원 확장공사로 인해 그리 멀지 않은 교차로로 옮겨질 예정인 그 동상은 나로 하여금 늘 광화문에 있는 이순신상을 떠올리게 했다. 1979년이라는 조성시점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게 그것은 이상하게 겹친다. 경복궁이나 강진읍내 같은 주된 장소 초입에 우람하게 버티고 선 모습이 그랬다. 칼 대신 부채를 들었지만, 큰 체구의 다산 선생은 내가 한참이나 높이 고개를 치켜들여야 눈에 뜨일만치 높은 좌대 위에 서서 전면을 굽어보고 있다.
 
올해 초 다산초당 곁 '말씀의숲'이라는 조형사업을 하면서 세워진 상은 종래 내가 생각보곤 했던 선생의 상과는 많이 달랐다. 유배지 강진에 만연했던 핍진한 현실세계의 부조리를 타파하려는 듯 선생은 갓을 벗어재껴 뒤로 넘기고 두루마기를 벗어 한손에 쥔 채 도포와 상투머리 차림으로 한손을 들어 무언가를 가르키고 있다. 배가 약간 튀어나와 서 있는 모습은 다소 안정적이지 못해보였다. 보다 세부적인 형상을 뜯어보기도 전에 내가 거기에서 얼핏 녹두장군의 모습을 떠올렸다면 너무 빗나간 것이었을까?

바로 얼마 전에 김호석이 그려낸 초상화는 그런 다산선생의 위엄있고 다이나믹한 모습과는 다소 달라보였다. 초상화라는 수묵의 재현인 탓이 크겠지만, 다른 상들에 비해 그것은 한층 차분하고 정제된 내면의 응시로 귀결되는 듯 했다. 나는 이를 세종대상, 이순신, 율곡과 논개 같은 숱한 역사적 인물들의 초상들과 자주 비교해보곤 했다. 나는 또 스스로 '외탁을 했다'고 한 그의 외증조부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과 그것을 비교해보기도 했다.  

초상화를 그리지 않았고, 더우기 사진은 찍지도 않았던 다산선생의 상을 재현하는 것은 여러모로 복잡다기한 일일 거다. 원본이 없으므로, 설사 원본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실제의 다산선생이 아니라 복제된 이미지일 뿐이므로, 재현된 상은 여러가지 생각들이 겹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가 이런 과정을 통해 다산이라는 텍스트를 여러모로 넓고 깊게 궁구해간다는 사실이다. 안타까운 건 다양한 해석과 이견들을 인정하지 않는 원본 텍스트라는 독선이다. 이미 '저자는 죽었'는데도 말이다.  

by 물소리 | 2009/10/14 14:39 | 이미지산책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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